“마음 저 깊은 곳에 있는 유년시절의 행복은 평생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유년시절이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후반부에 서머힐 학교의 교장으로 재임 중인 소이 레드헤드가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문장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가장 내 가슴에 와닿았던 말이기도 하다. 이 한 문장을 보면 서머힐 학교가 가지는 교육에 대한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다. 유년시절의 행복이 소중하다는 것, 그래서 유년시절에는 행복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학교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행복, 그 행복을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어른이 되면 누릴 수 있을 것이라며 포장하고 미루도록 권유하고 있다. 경쟁을 통해 친구들의 위에 설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주입을 한다. 같은 옷을 입히고,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머물게 하며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고 낮은 위치에 자리하게 된 이들에게 실패라며 낙인을 찍는다. 어느 과정에서도 아이들의 행복이 고려된 부분은 없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 교육의 모습이다.


     서머힐 학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받았던 12년의 교육과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스스로 물었다. ‘나는 어린 시절 행복하였는가?’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밟아왔다면, 나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경쟁하며 땀 흘리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때는 열정이 있어서 행복했어.”라고 답할 지도 모른다. 애써 행복을 찾아서, 스스로 나는 행복했다라며 만족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을 서머힐 학교에서처럼 지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했던 도심에서, 변두리의 시골로 집을 옮겼다. 그곳엔 그 흔한 동네 구멍가게조차 없었으며, 쭉 뻗은 2차선 도로 옆으로 덩그러니 주유소가 하나 놓여있었을 뿐이었다. 집을 가기위해서는 산비탈을 올라야 했고 그 길의 양쪽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이면 개구리 울음소리와 풀 냄새를 맡으며 걸었고, 겨울이면 귀를 베일 것 같은 칼바람을 맞으며 걷곤 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재미없는 동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지만, 나에겐 매일 흥미진진한 나날이었다. 아버지는 개, , 돼지를 비롯한 짐승들을 많이 키우셨으며, 나 또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짐승들의 먹이를 주곤 했었다. 집에는 내가 가지고 놀기에 좋은 망치나 톱, 삽 등의 연장들이 많았고, 동네에는 대나무 숲이 있어서 항상 나는 직접 자른 대나무 막대기를 손에 쥐고 다녔다. 어머니는 나에게 공부할 것을 강조하지 않으셨고, 나는 학교를 마치면 아무런 걱정 없이 집근처 산에서 쏘다니곤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통학을 위해 학교와 가까운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6년간 시골에 살다가 도시로 이사를 나오니 그것 또한 기분이 좋았다. 마치 시골 청년이 처음 상경을 하였을 때의 기분이랄까. 물론 고등학생이 되면서 공부를 시작해야했기에 마냥 도시의 감흥에 취해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 1년간은 안하던 공부를 하려니 좀이 쑤셔서 힘들었다. 그러나 1년의 적응 과정을 거쳤더니, 2학년과 3학년시기에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스트레스에도 면역이 되어있었다. 쉽게 지치지도 않았고 꾸준하게 힘이 났다. 마치 한여름 강렬한 뙤약볕 아래에서 뛰어 놀았던 날은 밤이 되어도 몸에서 열이 나는 것처럼, 어린 시절 강렬하게 겪었던 행복감은 시간이 지나도 몸에서 행복감이 나오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렇게 2년간 공부를 하고서, 나는 대학진학에 성공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겪는 행복감의 중요성을 알기에, 서머힐 학교를 바라보는 내내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훗날 내 아이도 서머힐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한국에서도 전원주택을 짓고 아이를 키우면 되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것은 어렵겠다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짓게 되었다.


     한국의 교육은 어쩌다 주입식으로 가게 되었을까? 한국에서는 아이들의 행복권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빨리빨리라는 새로운 사회적 풍토가 생기게 되었다. 모든 일을 빨리 처리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효율성을 중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선 빨리 공부를 시키고, 빨리 성인으로 키워, 빨리 사회로 보내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경쟁만 남은 교육이 되었을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 효율성을 버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서머힐 교육은 아이들이 행복하지만, 손도 많이 가고,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 내가 시골에서 자랄 때 부모님은 아주 힘드셨을 것이다. 시내로 나가는 방법은 자가용 또는 1시간 반에 1대 있는 버스가 유일했고, 그래서 아버지는 시내의 중학교로 진학한 나를 위해 매일 아침 나를 직접 등교시켜주셨다. 키우시던 짐승들은 때로 산짐승의 습격을 받아 죽어 나가기도 했다. 겨울이면 수도가 얼어 옆 동네에서 물을 떠 와서 사용했고, 한겨울엔 씻기 위해서 어머니가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여주셨다. 아버지는 산 중턱에 있는 물탱크를 녹이기 위해 뜨거운 물 한 바가지를 들고 겨울 아침마다 산을 오르셔야 했다. 그러다가 아파트로 이사하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 앞 마트에서 바로 사먹을 수 있었고, 수도꼭지를 틀면 언제든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교통도 훨씬 좋아서 급한 날엔 언제든 택시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시골에서 겪던 체력적 소모들이 도시에 오자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도시나 아파트보다는 자연에서 집짓고 사는 것이 훨씬 건강하다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물론 건강상에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파트와 도시가 주는 효율성과 편리성은 쉽게 버리기 힘들 것이다.


     비슷한 시각에서, 한국의 효율적 교육이 주는 장점도 분명 있다. 그 예로 한국 학생들의 지적 수준은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의 행복의 수준은 높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우리도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 번에 서머힐 학교의 교육을 도입하는 것은 분명 힘들 것이다. 인프라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다. 누군가는 비용과 비효율성을 이야기하며 반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천천히 인프라를 구축해 나간다면, 서머힐 학교보다 더 좋은 교육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자료




    Posted by 티엘에이